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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앞에서 - 프란츠 카프카

OJR 2009. 10. 28. 12:05

법 앞에서 - 프란츠 카프카


법 앞에 문지기가 하나 서 있다. 시골에서 한 남자가 찾아와 문지기에게 법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그에게 입장을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남자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나중에는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럴 수 있겠지요."
문지기가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안 돼요."
법에 이르는 문이 여느 때처럼 열려져 있는데다가 문지기가 옆으로 비켜섰기 때문에 그 남자는 그 틈에 문 안을 들여다보려고 허리를 구부린다. 문지기가 그것을 보더니 웃으면서 말한다. "그렇게 마음이 끌리면 나를 제치고 한 번 들어가 보시오. 하지만 내가 힘이 세다는 걸 명심해둬요. 나는 가장 말단 문지기에 불과하지만 방에서 방으로 갈수록 힘이 센 문지기들이 서 있어요. 세 번 째 문지기의 얼굴을 나는 쳐다보지도 못했어요."
시골에서 온 그 남자는 그러한 어려움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법은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 때 모피 외투를 입은 그 문지기를, 그 사람의 커다란 뾰족코와 길고 엷은 타타르풍 턱수염을 자세히 살펴본 그 남자는 입장 허가를 얻어낼 때까지 차라리 기다리기로 결심한다. 문지기는 그에게 걸상을 하나 건네주고 한 쪽 문 옆에 앉으라고 한다. 그는 몇 날 몇 해고 거기에 앉아 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려는 여러 번의 시도를 한다. 그는 끈질긴 부탁으로 문지기를 피곤하게 만든다. 문지기는 가끔 가다 몇 마디씩 던져 그 남자를 신문(訊問)해 본다. 문지기는 그에게 고향과 그 밖에 여러 가지 것에 대해서 물어본다. 그러나 그것은 높으신 분들이 으레 던지는 하나마나한 질문들과 다름없다. 언제나 끝에 가서는 문지기는 아직은 그를 들여보낼 수 없다고 말한다. 여행을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해 가지고 온 그 남자는 모든 것을 탕진한다. 문지기를 매수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아주 값진 것이라고 해도. 문지기는 그 모든 것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받는 것은 다만 당신이 무언가 빠뜨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지요."
그 여러 해 동안 그 남자는 문지기를 거의 끊임없이 관찰해 왔다. 그 남자는 다른 문지기들의 존재는 망각했다. 그리고 이 첫 문지기만이 그가 법으로 들어가는 데 있어서 유일한 방해물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 불행한 우연을 저주하고 화를 냈다. 첫 몇 년 동안은 막무가내로 그리고 큰소리로, 나중에 늙어서는 그저 조그만 소리로 투덜댔다. 그는 이제 노망기가 들었다. 문지기를 오랫동안 살피는 과정에서 그 남자는 문지기의 외투 깃에 살고 있는 벼룩까지도 알게 되어 벼룩에게도 그를 도와 문지기의 마음을 바꾸도록 해 달라고 부탁한다. 마침내 그는 시력까지 약해져, 정말로 그의 주변이 어두워진 것인지 아니면 단지 그의 눈이 착각을 일으키는 것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어둠 속에서 법의 문으로부터 뻗쳐나오는 뚜렷한 빛살을 알아본다. 이제 그는 앞으로 얼마 살지 못한다. 죽음을 앞두고 그 남자의 머릿속에서는 지난 모든 경험이 그가 지금까지 그 문지기에게 아직 던지지 않은 한 가지 질문으로 집약된다. 그는 굳어가고 있는 자기 몸뚱어리를 더 이상 일으켜 세울 수 없기 때문에 문지기에게 눈짓을 한다. 문지기는 그를 향해 깊이 허리를 굽혀야 한다. 왜냐하면 키의 차이가 그 남자한테 아주 불리한 쪽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뭘 더 알고 싶어요?"
문지기가 묻는다.
"당신은 정말 물릴 줄 모르는군요."
"모두들 법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남자가 말한다.
"어떻게 해서 그 오랜 세월동안 나 외에 아무도 입장을 요구하지 않은 거지요?"
문지기는 그 남자의 종말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문지기는 그 남자의 꺼져가는 청력에 닿을 수 있도록 큰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는 어느 누구도 입장을 허가받지 못했지요. 왜냐하면 이 문은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서 만들어졌으니까요. 나는 이제 문을 닫아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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